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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더L / 기업 비자금의 진화 ② 해외 자금세탁의 세계 ◆

 

 

기업이 비자금을 만드는 목적은 다양하다. 단순히 사주 일가를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세금을 피하거나 정·관계 로비 등에 사용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드러낼 수 없는 돈이기 때문에 들키지 않으려면 출처와 행방을 숨기는 '돈세탁(money laundering)'이 필수다. 돈세탁은 1920년대 미국 범죄조직들이 탈세를 위해 불법수익금을 합법적 자금으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쓰던 속어다. 1986년 돈세탁통제법이 제정되면서 공식 법적용어로 사용됐다. 국내에선 1990년 검찰 공소장에서 돈세탁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2014년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에 따르면 연간 최대 3조8650억달러(약 4524조원)가 전 세계에서 세탁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5%에 달하는 규모다. 25회째를 맞는 법률법조 전문섹션 레이더L은 비자금 3부작의 두 번째 편으로 '해외 자금세탁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국내 주요 기업이 해외에서 조성한 비자금을 '어떻게 굴리고 세탁한 뒤 국내로 들여오는지' 판결문을 통해 분석했다.

 

"우리 회사가 재작년에 이탈리아 M사와 계약을 새로 맺었습니다. 계약서엔 우리가 아닌 홍콩법인이 M사 국내 면세점 판매권을 가지는 걸로 돼 있어요. 홍콩법인은 이름만 빌려주는 페이퍼컴퍼니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죠? 내가 물밑 작업은 다 해놨으니, 정 대표 이름으로 홍콩법인 지분만 이전받으면 됩니다."

 

◆ '페이퍼컴퍼니' 돈세탁의 기본

 

1996년 가을, 정 모씨는 K사의 새 대표이사로 취임해 이런 인수인계를 받았다. K사는 이탈리아 M사의 명품을 한국에 독점 판매하는 회사다. 곧 정씨는 홍콩법인의 최대주주가 됐다. 정씨가 유일한 주주로서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설립한 페이퍼컴퍼니 C사가 홍콩법인 전체 지분 중 98%, 정씨 동생이 1%를 인수했다. 2006년에는 정씨 자신이 유일한 주주로 있던 홍콩의 G사도 인수했다. 검찰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지분 구조를 복잡하게 만든 것이다.

 

면세점 판매대금은 새 계약에 따라 K사 대신 홍콩법인 계좌에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이는 다시 각종 비용 명목으로 C사와 G사로 이체됐다. 2005년부터 2011년까지 해외로 흘러간 금액은 총 87억원에 달한다. 검찰은 K사가 아무 역할도 없는 홍콩법인을 M사의 계약 당사자로 내세운 것은 판매대금을 홍콩으로 빼돌리기 위한 속임수로 보고 정씨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재산국외도피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해 말 1심에서 "(숨긴 돈이) 투기, 탈세, 비자금 조성 등 각종 불법적인 용도로 사용될 단초를 제공했다"며 정씨에게 징역 8년을 선고했다.

 

 

◆ 해외 세탁 뒤 차명투자

 

이처럼 '페이퍼컴퍼니'는 돈세탁 과정에 빠지지 않는다. 페이퍼컴퍼니로 거래를 복잡하게 만들수록 적발이 어렵기 때문이다. 돈세탁 이후엔 은밀한 투자 내역이 섞인다. 실제 최근 국내 재력가들은 버진아일랜드 내 페이퍼컴퍼니 명의의 스위스 은행 계좌, 에드루샤의 그림 '산', 미얀마 광산 등에 세탁한 돈을 투자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이름도 낯선 카리브해 섬에 회사를 세우고, 수십억 원에 달하는 외국 작가의 그림을 사는 데 기꺼이 금고를 열었다.

 

검찰은 이를 비자금 사용처인 동시에 돈세탁 수단으로 보고 출처와 행방을 뒤쫓는다. 그럴수록 돈은 더 복잡한 단계를 거쳐 해외를 돌며 세탁된다.

 

최근의 대표적인 사례는 외국 방위산업체에서 받은 중개 수수료를 해외 페이퍼컴퍼니 명의 차명계좌에 보낸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재산국외도피) 등으로 지난달 기소된 '1세대 무기거래상' 정의승 씨(76)의 범죄다. 그는 20여 년 전 '율곡사업 비리' 사건으로 재판도 받았다. 정씨는 2001년 3월~2012년 8월 독일 잠수함 제조업체 등으로부터 받은 중개 수수료를 독일 리히텐슈타인에 설립한 페이퍼컴퍼니 명의의 스위스 소재 은행 계좌로 옮겨 관리한 혐의를 받고 있다. 금융범죄에 정통한 한 부장검사는 "돈세탁은 불법 대출을 받아 차명계좌로 추적을 따돌린 뒤 차명으로 주식을 매수하는 등 여러 과정을 거치는 것이 최근 추세"라고 말한다.

 

◆ 돈세탁의 고전, 미술품 거래

 

미술품 거래는 뒤처리가 깔끔해 돈세탁의 '고전'으로 통한다. 상세한 거래 내역을 공개할 의무가 없는 데다 정해진 가격이 없어 웃돈이 오가도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비자금을 묻어두거나 은밀하게 상속하려는 이들에겐 한 점에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작품은 매력적인 선택지다. 미술품 거래는 2007년쯤 삼성그룹이 수백억 원의 비자금으로 로이 릭턴스타인의 작품 '행복한 눈물'을 구입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주목받았다. 그림의 실소유주가 삼성가가 아닌 홍송원 서미갤러리 대표(63)로 밝혀지면서 의혹은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홍씨는 이후에도 CJ그룹 횡령·조세포탈, 남양유업 증여세 탈루, 오리온그룹 비자금 사건 등 굵직한 기업 비리 사건마다 '재벌들의 미술상'으로 수사선상에 올랐다.

 

◆ 돈세탁, 전문가 도움이 필수

 

돈세탁은 '전문가'들의 도움이 필수다. 한 외국 변호사는 "조세회피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할 때 현지인 구성원 수를 충족해야 하는 경우 로펌 변호사들이 이사로 이름을 올리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때론 국내 변호사도 동원된다. 대형 로펌 출신의 한 기업 형사사건 전문변호사는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전부터 해외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해달라는 기업들의 요청이 몰렸다"고 말했다. 그는 "특별한 전문지식이 필요하지 않은 데다 조세회피처의 경우 절차가 간단해 해외 인맥이 넓은 외국변호사들뿐만 아니라 기업·금융 분야의 국내 변호사들도 쉽게 법인을 설립했다"고 덧붙였다.

 

 

이현정 기자 / 정주원 기자자료제공 매일경제
발행일 2016.05.10기사입력 2016.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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