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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내 페이스북에 지난 달 발생한 구마모토 지진에 대한 글이 올라왔다. 모 인터넷 언론사의 기사였다. 읽어보니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지진 희생자에 대해 마냥 마음 아파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일본이 과거 한국에 고통을 안겼고, 아직도 충분히 사죄하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구마모토에 태어난 옛 일본인들이 조선침략에 기여했다는 이야기까지 거론했다. 이를 계기로 인터넷에서 지진 관련 댓글을 읽어보니, 일본인의 고통에 즐거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증오와 미움이 연민을 삼킨 게 분명했다. 지진으로 가족을 잃고, 뼈가 부서지고, 생활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에게 연민과 동정조차 느끼지 않을 정도가 됐다. '반일감정'이라는 증오가 휴머니즘을 죽인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꽤 강한 '반일감정'에 빠져 있었던 적이 있었다. 일제시대 일본이 우리에게 저지른 만행에 분노하며, 그들을 미워했다. '일본은 없다' 같은 황당무계한 책을 읽고는 기뻐했다. 세계 시장에서 일본이 승승장구하면 배가 아팠다. 우리가 그들을 이겨야 한다고 확신했다. 부끄러울 정도로 유치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나는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과 일본인을 다른 나라보다 싫어하는 마음, 다시 말해 '반일감정'을 버렸다. 민족과 국가의 차이를 넘어 나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일본인을 바라보게 됐다. 나와 다른 타자라는 구분이 없어지면서, 인간으로서 그들의 고통에 연민을 갖게 됐고, 그들의 기쁨에 같이 기뻐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됐다.

 

그 계기는 뜻하지 않게도, 1988년 TV에서 중계된 '5.18 광주민주화항쟁 진상규명을 위한 청문회'였다. 전두환과 함께 신군부의 일원이었던 정호용 씨는 "우리 군인이 우리 국민인 광주 시민을 죽였다는 건가. 이는 우리 군인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취지의 논리를 폈다. 나는 순간 딜레마에 빠졌다. 내 주변의 형, 동생과 다를 바 없는 젊은 청년 군인들이 선량한 시민을 사살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젊은 청년 군인들은 비윤리적인 살인자가 되는 게 아닌가? 하지만, 군인 발포로 여러 시민들이 사망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당시 나는 그 딜레마를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나는 나이가 들면서, 권위와 복종에 대해 좀 더 공부하게 되면서, 그 딜레마를 풀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일본인을 국적보다는 나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보게 됐으며 반일감정의 무게에서도 벗어났다.

 

인간은 잘못된 권위에 복종하면 얼마든지 선량한 다른 인간을 죽일 수 있는 존재다. 이는 예일대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의 유명한 '복종 실험'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흰옷을 입은 연구자의 권위에 복종해 실험 참여자들은 옆 방에 있는 선량한 사람에게 전기충격을 가해 그를 죽이는 선택을 했다. 10명 중 6명 꼴로 그런 선택을 했다. 오랜 경험과, 지식, 숙련을 닦은 사람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았다. 숙련된 간호사들이 가짜 의사의 전화를 받고 환자에게 치명적인 약을 투여하려고 했다는 필드 스터디가 그 증거다.

 

이 같은 심리학 연구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인간은 권위에 복종하는 순간, 그 권위의 충실한 이행자가 되는데 집중한다. 양심은 부차적인 게 된다. 그렇기에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량한 인격을 닦은 사람이라고 해도 일단 잘못된 권위에 복종하는 순간, 그의 인격은 얼마든지 악마가 될 수 있다. 선량한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 양심의 호소는 들리지 않는다.

 

이 같은 사실을 깨닫고 난 뒤에, 나는 왜 5.18 광주에서 선량한 군인들이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선량한 시민들에게 발포할 수 있었는지 알게 됐다. 전두환 신군부라는 '잘못된 권위'가 군을 장악했고, 그 권위에 군인들이 복종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 한들, 과연 나는 발포 명령을 거부할 수 있었을까? 신군부의 권위에 복종해 악마가 나를 삼키도록 허락했을 것만 같다. 더구나 명령에 대한 복종은 군인의 의무가 아니던가?

 


지난 5월 18일 열린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정의화 국회의장(맨 왼쪽) 등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민주주의를 억압한 '신군부’의 '잘못된 권위’에 저항했다.<출처=매경 DB>

 

이 때부터 나는 독일 나치와 일본 제국주의의 잔혹한 만행을 다른 시각에서 보게 됐다. 그 만행의 주체를 나치, 일본 제국주의라고 보는 데에서 더 나아가 '잘못된 권위에 빠진 인간들' 과 '그 잘못된 권위에 복종한 또 다른 인간들의 악행'이라는 관점을 갖게 됐다. 그들이 독일인이라서, 일본인이라서 저지른 잘못이 아니고, '나와 똑같은 인간'으로서 저지른 악행이라는 인식을 갖게 됐다. 그들의 만행은 독일인과 일본인의 악을 드러낸 게 아니라 인간 자체의 악을 드러낸 것이었다. 제2차 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에 참여한 독일 101 경찰예비대대를 예로 들어보자. 고등교육을 받은 중산층 이상 중년 남성으로서 강제로 징집되지 않았는데도 유대인 학살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나치'라는 잘못된 권위에 복종하면서, 양심을 망각한 채, 권위자의 의지를 실행하는데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그 부대원들이 나보다 성품이 비윤리적이어서, 지식이 없어서, 그 같은 씻을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을까? 아니다. 인간은 권위자에 복종하고 그의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순간 살인자가 될 수 있다.

 

내게 유대인 학살, 위안부 착취 사건 등은 '인류의 존재를 위협하는 인간의 약점'을 입증하는 증거로 보였다. 예를 들어 도널드 트럼프처럼 대놓고 인종차별을 외치는 사람이 미국 대통령이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 권위에 복종하면, 아무리 선량한 사람이라고 해도 양심과 휴머니즘은 부차적인 게 된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한걸음씩 인종차별정책을 집행하게 될 것이다. 선량한 사람 역시 그 같은 악행의 가능성을 내면에 품고 있다는 점에서 '악은 인간 모두에게 잠재돼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에게 악은 '보편성'을 갖고 있다. 이는 인류에 대한 분명한 위협이며, 인간 내면의 치명적 약점이다.

 

악의 보편성을 인식하게 되면서 나는 일본이 우리에게 저지른 '죄'와 '일본인들'을 분리해서 생각하게 됐다. 우리 역시 언제든 그들이 저지른 죄악과 같은 악행을 범할 씨앗을 내면에 갖고 있다면, 그래서 잘못된 권위에 복종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우리 역시 그들에게 흉포한 만행을 저지를 수 있다면, 과연 '인간 대 인간'으로서 그들을 어느 정도까지 반대하고 싫어해야 하는 것일까? 예수가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지 않을까? 더구나 전후 일본은 제국주의와 완전 결별한 정치체제를 구축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식민지 시대 당시 일본이 저지른 죄에 분노하는 것은 옳지만, 그리고 그 죄를 촉발하게 만든 '일본 제국주의'라는 잘못된 권위를 반대하는 것은 옳은 일이며 직접적으로 그 죄악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자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믿음은 단 한 순간도 변한 적이 없지만, 과거 악의 계획자나 집행자가 아닌 '지금 일본인들'을 다른 나라 시민들보다 더 미워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반일감정을 버렸다. 구마모토 지진이 발생했을 때, 같은 인간으로서 마음 아파했다.

 

나는 일제 시대 일본의 악행에 대한 우리 역사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의 악행은 '과거 일본의 악행'일 뿐만 아니라 '잘못된 권위의 악행'이며 동시에 '그 권위에 복종하는 인간의 악행'임을 가르쳐야 한다. 단지 그 악행을 일본인들이 저질렀다는 점을 강조하고 '일본은 나빴다'라고만 가르친다면 그릇된 반일감정으로 오도될 위험이 있다. 그들의 악행은 일본인으로서라기보다는 인간으로서의 악행이기에 바로 언제든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실제로 5.18 광주에서의 발포, 6.25전쟁 당시 여러 차례 발생했던 민간인 학살 등은 평범한 우리 내면에 악의 씨앗이 자리잡고 있음을 입증한다. 잘못된 권위의 지배를 받게 되면, 우리 역시 학살의 주범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우리 역사 교과서에 우리 자신의 부끄러운 역사, 우리 중 일부가 또 다른 우리에게 저지른 만행 역시 기술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를 통해 선량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잘못된 권위에 복종할 경우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는 '악의 보편성'을 가르쳐야 한다. 한국 역사에서 악행을 지우고, 한국사는 마치 '죄 없는 순결한 역사'인 양 가르친다면, 우리 후손의 정신은 악마에게 무방비로 노출될 것이다.

 

우리는 악의 보편성을 인식할 때, 비로소 깨어 있을 수 있다. '혹시 내가 잘못된 권위에 복종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나도 모르는 순간에 내 인성이 야만으로 물들어가는 게 아닌가'라고 스스로 의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같은 의심이 있어야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따르는 권위가 잘못된 것인지, 정당한 것인지 감시할 수 있게 된다. 민주적 절차에 따라 선출된 권위라고 안심해서는 안 된다. 선거에 의해 권력을 장악한 나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악랄한 정권이 됐다. 만약 우리를 지배하는 권위가 정당하지 못하다면, 우리는 그 권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내가 머물고 있는 기업이 악한 권위에 지배당하고 있다면, 회사를 떠나는 게 옳다. 그 권위 안에 머물고, 그에 복종하면 우리가 아무리 선량한 인성을 타고났다 한들, 선량한 이웃에게 씻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고도 일말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야만에 빠질 수 있다.

 

일제시대 독립투사의 항쟁, 광주민주화운동은 잘못된 권위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똑같다. 전자는 일본 제국주의에, 후자는 권위주의적 군부 통치에 '노(no)'라고 말했다. 독립투사와 1980년 5월18일 광주 시민들은 잘못된 권위에 복종하지 않고, 자기 양심의 호소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깨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며칠 전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과 몇 달 후 다가올 8.15 광복절은 내게 똑같은 의미를 가진다. 잘못된 권위에 복종해 내 자신의 인간성과 양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되새긴다.

 

내가 반일감정을 버린 것도 그 같은 인식 덕분이기도 하다. 직접 죄를 저지른 일본인이 아니라 일본인 일반을 반대하는 반일감정은 또 다른 잘못된 권위로서 한국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다. 우리가 그 권위에 복종하고 의문을 버리는 순간, 우리는 반일감정의 충실한 집행자가 된다. 우리의 양심, 휴머니즘, 인간애는 쪼그라든다. 그렇기에 구마모토 지진 피해자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잃게 되는 것이고, 김기종 씨가 일본 대사를 벽돌로 테러하려고 한 행위에 동조하게 된다. 내가 보기에 이 같은 행위는 잘못된 권위에 저항해 내면의 양심을 지키고자 했던 독립투사의 정신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다.

 

 

김인수 기자자료제공 매일경제
발행일 2016.05.20기사입력 2016.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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