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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드라마의 주인공처럼 한 번쯤 ‘막’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마음 가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사는 인생, 제법 쿨하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 일이랴? 인생 ‘막’ 사는 데에도 기술과 요령이 필요한 법. 게다가 그것도 꾸준히 해야 자기 것이 된다. 하지메라는 일본 여인이 있다. 대학 시절 여행만 다니다 사진작가가 되고, 그 후 꼭두각시 인형을 든 유랑예인으로 살다가 갑자기 간호사로 둔갑한 여인. 서른셋, 그녀의 젊음에 올해도 봄바람이 분다.

여행만 다니느라 학교에는 모습도 비추지 않던 소문난 괴짜. 하지메(Hajime) 그녀는 필자의 대학 선배다. 인도와 중국 횡단을 마치고 학교에 등장한 그녀는 머리를 빡빡 밀고 인도 여성들이 입는 사리를 몸에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또 다시 중동에 아랍어를 배우러 8개월 간의 유학을 떠났다. 흔해빠진 유학이 아니라, 놀 ‘유遊’에 배울 ‘학學’을 쓰는 유학이라고 그녀는 말했었다.

대학을 졸업한 그녀는 여행 중에 촬영한 사진으로 대회에서 입상해 어엿한 사진가가 된다. 하지만 작가로 데뷔하자마자 카메라를 내던지고 다시 엉뚱한 길에 올랐다. 우연히 알게된 80대 노인으로부터 꼭두각시 인형극을 배운 것. 유랑예인으로 홀로 인형을 들고 길거리 공연을 시작해 한국에도 왔었다. 그렇게 인형사로 살아가려나 했더니 웬걸? 올해부터는 간호사로 병원에 근무하게 되었다는 예측불허의 여인, 그녀의 과거, 현재, 미래가 궁금하다.

당신의 출생에 관해 알고 싶다.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는가?

나의 부모는 여행 중에 타이에서 만나 결혼을 하고 나를 낳았다. 배낭여행족이던 부모를 둔 덕분에 다섯 살 때 어린이집을 자퇴(?)하고 첫 여행을 떠났다. 중국, 네팔, 티베트를 거쳐 동남아시아까지 돌아다닌 1년간의 가족 여행이었다. 돌아와서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입학식 날 ‘차렷, 경례’의 뜻을 몰라서 놀림을 샀다. 그 후에도 몇 번인가 여름 방학을 끼고 석 달씩 여행을 다녔다. 아버지는 나와 동생에게, ‘땅을 보고 걸어야 동전을 줍는다’며 가난한 여행가의 자세를 걸음마부터 철저히 가르치셨다. 중고등학교는 평범하게 다녔지만, 몹쓸 방랑의 피가 대학생 때 다시 끓어 올랐다.

중국 북서부, 실크로드를 대표하는 도시 중 하나인 카슈갈(카스)의 바자르(시장) 사진.
일본의 중요 사진대회 중의 하나인 우에노히코마상(2006년도)에 입상한 하지메의 작품

어쩌다가 사진작가가 되었는가?

일본을 떠나기 전 교수님이 중고 카메라를 주셨다. 눈앞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운데 그림을 못 그리니, 사진으로나마 남겨두고 싶어서 찍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사실 내 아버지가 프로 사진 작가인데, 나는 사진을 배워본 적도, 카메라를 가져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사진을 찍으며 나에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진가의 피가 흐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행을 다니며 평생 찍을 만큼 엄청난 양의 사진을 필름에 담았고, 귀국 후 우연히 응모한 사진전에서 예기치 못한 큰 상을 받았다.

사진작가로 살았어도 될 것을, 왜 사진을 관두고 꼭두각시 인형사가 되었는가?

아버지 때문에 사진가의 삶을 보며 자랐지만 그 처럼 살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사막에서 사진을 찍다가 한쪽 눈의 각막에 이상이 왔다. 사진을 관두라는 신의 계시였다. 사진 찍히기를 꺼리는 아랍인들을 만나며 ‘사진은 착취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기본적으로 누군가가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는 타입이라, 입상을 계기로 ‘이때다!’ 하고 사진을 관두기로 했다. 그런데 , 시상식에 가는 도중 길에서 우연히 지금의 스승을 만났다. 꼭두각시 인형으로 행인들을 매료시키던 여든이 넘은 노인의 모습에 충격을 받아, ‘저거다!’하고 바로 인형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스승은 어떤 사람인가?

스승의 전직은 골동품 수집가였다. 민가의 창고에 있던 물건들을 사모으며 평생을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집이 화재로 불타버리고 남은 것은 에도시대부터 전해오던 인형 몇 점뿐.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려 꼭두각시 인형극을 창작했고, 수 십 년을 가난한 인형사로 살았다. 그의 첫 제자가 되고, 나는 그 인형 중 하나를 물려받았다. 그는 집을 나와 방황하던 지적장애인 여성 한 명과 함께 살고 있는데, 둘이 이상한 관계는 아니다. 소외된 사람들끼리 서로 도우며 찌질하고 가난하게 살고 있을 뿐이다. 나도 그 집에 들어가 살며 인형을 배웠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유랑예인이 되어 길거리에서 인형춤을 추던 시절은 어땠나? 기억에 남는 일은?

일본에는 지역마다 ‘마츠리’라는 것이 있다. 신사에서 열리는 축제 같은 거다. 그때마다 인형을 들고 가서 민요를 틀어놓고 혼자 인형춤을 췄다. 춤은 내 멋대로 하면 되지만, 조작법은 스승에게 전수받았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내 인형 앞에서 까르르 웃는 것이 기분이 좋았다. 동전도 제법 모였다. 처음엔 창피했지만, 곧 얼굴에 철판이 깔렸다. 한국의 경복궁과 인사동에서도 거리 공연을 했는데 엄청난 인파가 모였다. 덕분에 그 돈으로 귀국행 비행기표도 샀다.(웃음)

한국에서 인형극을 했을 때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는가?

겨울이라 무지 추웠다. 중고로 산 싸구려 스키복에 모자를 눌러 쓴 채 거리에 나갔다. 인사동에서 한국 뽕짝을 틀고 춤을 추고 있는데 한 꼬마가 와서 ‘아저씨, 인형 얼마에요?’ 물어봤다. 빵 터졌다. 그게 벌써 4~5년 전 일인데, 그 때 연락처를 주고받은 한 한국 여성이 얼마 전 나를 찾아왔다. 당시의 공연을 보고 감명을 받아 자신도 꼭두각시 인형사가 되기로 결심했다나? 그녀와 함께 몇 주 전 오사카에 계신 스승을 찾았다. 살다 보면 별일이 다 있다.

하지메_스승님 댁에서 존경하는 스승님과 함께 얼마전
한국에서 하지메를 만나러 온 학생과 함께 스승님 댁을 찾았다.

그런데, 왜 또 인형사를 관두고 갑자기 간호사가 된 건가?

한국에 있을 때, 인형극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자 대만에서 온 한 의대생이 나를 경복궁에서 봤다며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한국인 여학생은, 뉴욕에 유학을 갔다가 자신이 원하던 작곡가의 길을 가기 위해 부모 몰래 한국에 귀국했다고 했다. 그들과 친구가 되어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의사라는 직업이 멋져 보였고,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그녀가 예뻐 보였다. 그 만남이 내가 간호사의 길을 걷게 되는 큰 계기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 근처의 간호학교에서 장학생을 뽑는다는 광고를 보고, ‘저거다!’ 하고 입학을 결심했다. 3년간 학교에 다녔고, 올해부터 간호사로 일할 예정이다.

어떻게 그리도 ‘막’ 사시는가? 마음 가는 대로 사는 삶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막 살아서 사람들 골치 좀 썩였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하지만 아주 생각이 없던 건 아니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나름 심각하게 고민했다. ‘20대를 어찌 살 것인가?’ 여러 연령의 지인들에게 물었더니, 그때는 누구나 ‘다 되는대로 살았다’더라. 하지만 20대는 인생의 기반을 만드는 중요한 시기라고 그들은 말했다. 그래서 기반을 만든다면 넓은 쪽이 좋다고 생각했고, 일단 얕아도 좋으니 ‘넓게’ 한 번 살아보자 결심했다. 그랬더니 서른이 된 나는 정말 넓지만 ‘얕은’ 인간이 되어있었다.(웃음)

시리아 다마스쿠스에 있는 이슬람교 시아파의 성지. 모하마드 가문의 한 소녀가 잠들어 있는 사원이다.
일본의 중요 사진대회 중의 하나인 우에노히코마상(2006년도)에 입상한 하지메의 작품

그래서 간호사가 되기로 했나? 앞으로 다시 여행을 가거나 사진을 찍을 생각은 없나?

금쪽같은 20대를 공중부양 상태로 살았지만, 그러다 보면 적어도 하나 정도는 생을 걸고 깊이 파볼 만한 거리가 생길 것이라 믿었다. 사진가는 나 자신을, 인형사는 타인을 즐겁게 하는 일이라 좋았다. 하지만 간호사는 건강하게 살길 원하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준다는 것에서 큰 매력을 느꼈다. 당분간 바빠서 여행은 못 가고, 사진은 이제 마음에 찍는다.

삶이 버거워 스스로를 해치는 젊은이가 늘고 있다. 그런 이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당신만의 조언이 있다면?

한국의 자살률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고 들었다. 살 힘도, 의욕도 없는 이들에게는 실상 아무것도 바래선 안 된다. 살려는 의욕이 없어도 생은 지속되기에 그걸로 괜찮지 않은가? 누가 뭐래도 그 사람의 삶은 그 사람밖에 살지 못하니 내게 이래라 말할 권리는 없다. 힘들어도 대신 살아줄 수가 없는 게 인생이니,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쉽게도 ‘보살핌’ 정도가 고작이다. 하지만 그 전제에는 항상 애정과 관심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앞으로의 계획은?

자랑은 아니지만, 여행하면서 소통을 위해 그간 영어, 중국어, 아랍어, 독일어, 프랑스어를 독학했다. 그러나 다시 공부해서 5개 국어를 제대로 마스터하고 싶다. 간호 공부도 전문적으로 더 하고 싶다. 혹시 이 일로 내가 또 다른 방랑길에 오르게 될지도 모르잖는가? 나처럼 생각 따라 맘 따라 사는 사람을 일본에서는 ‘스피리츄얼리스트(Spiritualist)’라 말하곤 한다.하지만 점쟁이처럼 그냥 운명을 믿는 게 아니라, 주어지는 상황과 다가오는 만남 등을 무심히 흘려보내지 말고 ‘이 상황, 이 사람이 과연 내 삶에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 것일까?’를 느끼며 사는 게 스피리츄얼리스트다. 삶이 주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 같다. 꼭두각시 인형극도 할만큼 했으니 이제 좀 더 깊은 내 길을 파며 걸을란다.

 

 

정신지자료제공 Citylife
발행일 2013.03.22기사입력 2013.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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