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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형 CSR의 뿌리가 되다…유일한 박사
최근 옥시의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자들이 속속 드러나면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이 시사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CSR란 기업을 둘러싼 사회에 대해 법적·경제적·윤리적 책임을 감당하는 경영 기법을 말한다. 기존에 CSR는 단순히 기업이 최선을 다해 품질이 좋은 물건을 만들고 노동자에게 적절한 사내 복지를 제공한다는 소극적 의미였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와서는 기업의 영업이익 중 상당수를 기부를 통해 사회에 환원하고 재단을 운용해 인재를 양성하는 적극적 의미로 변했다. 유일한 박사는 국내 기업가 중 최초로 CSR를 도입한 인물이다. 유 박사는 미국에서 독립운동과 병행해 공부를 마친 후 귀국해 유한양행을 세워 큰돈을 벌었다. 그리고 재산을 전액 사회에 기부해 유한공업전문대학을 세웠다. 당시 대부분 기업의 관심이 오로지 이윤 증대에만 쏠렸던 상황에서 유 박사의 행동은 다소 괴짜로 여겨졌지만, 현재 그는 CSR의 '선각자'로 여겨진다.
◆ 소년, 미국행 배를 타다
유일한 박사는 1895년 조선 평안도 평양에서 아버지 유기연과 어머니 김기복 사이에서 6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유기연은 재봉틀 장사로 성공한 인물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그는 1904년 어느 날 예배를 마치고 미국 유학생을 선발한다는 말을 듣게 됐다.
"이는 좋은 기회다. 우리 아이 중 한 명을 유학 보내 민족의 핵심 인물로 키우자!"
아버지는 당시 아홉 살이던 장남 일한을 유학을 보냈다. 일한은 독립운동가 박용만의 도움으로 미국 네브래스카주 태프트 자매의 양자로 들어가 성실한 삶의 태도를 배우며 평생 인생의 습관으로 삼는다. 낮에는 학교를 다니고 농사를 도우며 밤에는 영어를 공부했다. 방학 중에는 독립군 소년병으로 심신을 단련하고 신문 배달을 해 용돈을 모았다.
◆ 스포츠맨으로, 독립운동가로, 마침내는 사업가로
일한은 농사로 다져진 다부진 체격 덕분에 스포츠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여 미시간대에 미식축구 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미국 내 한인들의 민족운동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졸업 후 잠시 제너럴일렉트릭(GE)에서 일했던 그는 1922년 돈을 모아 사업을 차리기로 했다.
"무슨 사업이 좋을까. 그래, 동양인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자."
동양 음식, 특히 중국 음식에는 숙주나물이 많이 들어가지만 미국에서는 그리 구하기 쉬운 식재료가 아니었다. 숙주나물을 키우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쉽게 상하기 때문에 유통하기도 어려웠다. 일한은 '라호이식품회사'를 차린 뒤 숙주나물을 통조림으로 팔았다. 포장된 숙주나물은 오래 보존되고, 배달하기도 편해 차이나타운을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팔려나갔다. 미국 독립운동계의 거물인 서재필은 사업에 동참하면서 버드나무 모양의 상표를 손수 디자인해 선물했는데, 이는 훗날 유한양행의 회사 로고가 된다.
◆ 고향으로 금의환향해 유한양행을 차리다
일한은 1925년 숙주나물의 씨앗인 녹두를 구하기 위해 북간도를 들렀다가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20여 년 만에 만난 부자는 서로를 껴안고 그간의 회포를 풀게 됐다. 일한은 아버지를 통해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전해 듣게 됐다. 일제의 수탈로 밥을 굶는 사람들이 흔한 데다가 의약품이 부족해 말라리아, 장티푸스, 콜레라 등 전염병이 만연했다.
"이제 돈은 벌 만큼 벌었다. 이곳에서 입으로 민족운동을 외칠 때가 아니라 고국으로 돌아가 동포들을 돕자!" 일한은 라호이식품회사를 청산하고 1927년 고국으로 돌아가 제약업체인 유한양행을 차렸다. 중국계 의사인 아내 호미리 여사는 사업에 큰 도움이 됐다. 유한양행은 싼값에 안티푸라민, 혈청을 판매했다. 진통소염제인 안티푸라민은 저렴하지만 진통, 소염 등 다양한 분야에 탁월한 성능을 보여 폭발적으로 팔려나갔다. 이때 한 부하 직원이 마약성 의약품인 '모르핀'을 팔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일한은 대로했다. "약은 사람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다. 이따위 소리를 하느니 당장 회사에서 나가!"
그는 자신의 양심을 지켜가며 사업을 했다. 1939년 유한양행은 종업원이 회사의 지분을 보유하는 '종업원지주제'를 실시하기도 했다.
◆ 받은 모든 것을 사회에 환원
평생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살았던 일한은 받은 것을 모두 사회로 환원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자신이 고학했다는 것을 떠올리고 교육 사업에 뛰어들었다.
1952년에는 고려공과기술학교, 1964년에는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했다. 1969년에는 회사의 경영에서 물러나면서 회사를 전문경영인(CEO)이 경영하도록 했다. 당시 대부분 기업은 소유주가 직접 경영했기 때문에 그는 '미쳤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일한의 신념은 확고했다. 1971년에는 딸의 학자금으로 쓰일 1만달러를 제외한 전 재산을 교육 사업에 기부한다는 유서를 쓰고 세상을 떠났다. 1995년에는 그가 독립을 위해 활동한 이력이 밝혀져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유일한 박사는 세상을 떠났지만 '기업으로 획득한 이윤을 세상에 나누자'는 정신은 사회복지재단 유한재단과 유한대학, 유한공고에 남아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
▶▶ 유한양행 계열사들은
제약업체 유한양행은 국내 제약업체 중 1위로 지난해에는 1조1287억원의 매출액과 1260억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렸다. 의약품뿐만 아니라 건강기능식품, 생활용품, 동물약품, 화학품 등 다양한 관련 산업을 펼치고 있다. 관련 회사인 유한화학, 유한메디카, 유한크로락스, 유칼릭스 등은 모두 의약 관련 상품을 생산하고 있다.
미국 킴벌리클라크와 제휴한 유한킴벌리는 가정용품과 위생용품으로 국내는 물론이고 동남아시아 시장에서도 그 위상을 쌓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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