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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12월 철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왕위는 흥선군 이하응(1820~1898년)의 차남 재황(아명은 명복, 고종)에게로 계승됐다.
60여년간 세도를 누렸던 안동 김씨의 실권자들은 경악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흥선군은 영조 증손자인 남연군의 넷째 아들.
왕족이긴 했지만 안동 김씨 세도의 위세에 눌려 제대로 대접도 받지 못했다. 이런 인물의 아들이 어떻게 왕이 될 수 있었을까? 

고종이 왕위에 오르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아버지 흥선군이었다.
조선 역사상 왕이 아니면서 이처럼 적극적으로 아들의 왕위 계승을 주도한 인물은 없었다.
흥선군은 철종에게 후사가 없는 상황을 주목했다. 왕이 후사 없이 사망하면 후대 왕 결정의 책임은 대왕대비에게 있었다.
흥선군은 왕위 계승 지명권을 가진 신정왕후(조대비)에 대한 신임이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길임을 진작부터 직감했다.
신정왕후가 무엇보다 60년간 세도정치의 중심이 된 안동 김씨 세력 약화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도 흥선군에게는 힘이 됐다. 이런 분위기를 잘 알고 있던 흥선군은 신정왕후와 잦은 접촉을 가졌다. 

신정왕후 조씨는 효명세자의 세자빈으로 궁궐에 들어왔지만 세자의 요절로 실제 왕비에는 오르지 못했던 인물.
또 순종의 왕비인 안동 김씨 시어머니 순원왕후가 철종 때까지 수렴청정을 하는 과정에서 왕실 여성의 최고 지위도 누리지 못했다.
1857년 순원왕후의 사망으로 신정왕후는 왕실 여성 서열 1위의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풍양 조씨 명문가의 딸이자 헌종의 어머니였지만 시어머니와 안동 김씨 그늘에 가려 있던 신정왕후는 철종대 후반부터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냈고 철종이 승하하자 권력의 최고 정점에 서게 됐다. 처음부터 신정왕후의 신임 확보에 모든 것을 걸었던 흥선군의 노력은 결국 신정왕후로부터 그의 둘째 아들 재황(고종)을 왕으로 추대하는 결정을 이끌어냈다. 

1863년 12월 신정왕후는 재황을 철종 후계자로 지명한다.
흥선군에게 큰 아들 재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정왕후가 12살 소년 재황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처음엔 고종이 성년이 될 때까지 수렴청정을 하겠다는 정치적 계산도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신정왕후는 수렴청정을 포기하고 흥선군에게 거의 모든 권력을 위임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를 종식시키는 데는 흥선군이 적임자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종의 즉위로 조선 역사상 최초로 살아 있는 대원군이 조정의 최고 실권자가 된 상황이 발생했다. 

원래 대원군은 왕이 되지 못한 왕의 아버지를 일컫는 명사다.
선조의 부친 덕흥대원군, 인조의 부친 정원대원군, 철종의 부친 전계대원군 등 이미 3인의 대원군이 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아들이 왕위에 오르기 전 사망하면서 대원군으로 추증된 경우였다. 흥선대원군은 다르다.
아들을 왕으로 만든 주역이라는 프리미엄을 업고 흥선대원군은 10여년간 권력 중심에 있었다.
고종의 즉위 이후 주요한 정치 현장에서 왕의 이름은 사라지고, 흥선대원군만 언급되는 것은 그만큼 그의 비중이 절대적이었음을 보여준다. 

흥선대원군은 신정왕후와의 밀약 속에 고종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바로 섭정 체제로 들어갔다. 그는 안동 김씨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먼저 19세기 60년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부활시켰으며 삼군부를 설치해 군부 위상을 높였다.
당시 안동 김씨의 좌장 영의정 김좌근을 해임하고, 호조판서 김병기는 광주 유수로 좌천시켰다. 전 영의정 김흥근에게는 정계 은퇴를 강요했다.
흥선대원군은 영조의 후손답게 인재의 고른 등용을 위해 탕평정치를 시행했다.
남인과 북인이 등용됐고, 서얼과 서북인에 대한 차별도 완화됐다. 관직이 노론 중심 소수 세도 가문에서 다수의 능력 있는 인재로 관리 임용 폭이 넓어진 것이다. 

또 흥선대원군은 서원을 정리했다. 이는 젊은 시절 화양동서원을 찾았을 때의 수모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당시 노론의 정신적 영수로 추앙받던 송시열을 추숭하는 화양동서원은 노론 양반으로 넘쳐났고 추도 물결이 넘실거렸다.
왕족이라지만 초라한 행색을 한 대원군은 서원에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그곳 유생에 의해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다.
흥선군은 서원이 당쟁의 온상이란 점을 부각시키며 전국에 600여개소 서원과 사당을 철폐했다. 서원 철폐령에 전국 유생은 흥선대원군을 가리켜 ‘동방의 진시황’이라 비난하며 상소를 올렸지만 대원군 또한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백성을 해치는 자는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내가 용서하지 못한다. (중략) 서원은 지금 도적떼의 소굴이 돼버렸다.” 

이외에도 대원군은 양반 부담을 증가시키고 백성을 위한 적극적인 개혁 정책을 실시한다.
호포법을 실시해 양인에게만 부담시키던 군포(軍布)를 양반에게도 부담시키고 호포(戶布)로 개칭했다. 양반층에게도 군역의 의무를 부담하게 하는 호포제를 실시하니 농민층은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다.
흥선대원군은 또한 고리대로 변질된 환곡제를 상당 부분 폐지하고 백성의 공동 출자에 의해 운영되는 사창제(社倉制)를 실시해 탐관오리와 토호의 중간 수탈을 방지했다. 

경제 분야의 개혁 정책으로 자신감을 얻은 대원군은 통치 규범을 재정비하면서 영조가 추진했던 문화사업의 중흥을 다시 한 번 이룰 수 있게 됐다. 

흥선대원군의 업적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경복궁 중건 사업이다.
조선의 정궁이었으면서도 임진왜란으로 불탄 후 폐허로 남아 있었던 경복궁.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의 중건이야말로 잃어버린 왕실의 권위 회복을 위한 대규모 국가적 사업이라 판단했다. 조선 후기 그 어떤 국왕도 시도하지 못한 대대적인 경복궁 중건 사업이 시작됐다. 

먼저 재원 확보를 위해 원납전이라는 기부금을 징수했다. 원납전 1만냥을 내면 평민에게도 벼슬을 주고 액수가 10만냥을 넘으면 수령을 시켜줄 정도로 기부금 폐해도 컸다.
또 당백전(當百錢)이라는 고액 화폐를 발행해 물가의 폭등을 초래하고, 1결당 1두씩의 특별세를 거둬 백성 원성을 샀다.
특히 대토목공사였던 만큼 많은 백성들이 노역자로 동원됐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1867년 중건 사업이 완료됐다. 1868년 7월 2일 고종이 조선을 상징하는 궁궐 경복궁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대미를 장식한다.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사업은 많은 무리가 따랐고 백성 불만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조선 후기 내내 폐허로 남아 있었던 조선의 정궁 경복궁이 본모습을 찾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승승장구했던 흥선대원군이 실각하는 계기가 된 것은 한 상소문 때문이다.
1873년 10월 동부승지를 사직하는 최익현(崔益鉉, 1833~1906년)의 상소문은 충격적이었다. 최익현은 당시 누구도 거론하지 못했던 집권자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한정 없이 받아내는 세금 때문에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있으며, 떳떳한 의리와 윤리는 파괴되고 관리 기강은 무너지고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괴벽스럽다 하고, 개인을 섬기는 사람은 처신을 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개인’이란 바로 흥선대원군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상소문이 올라왔던 1873년은 고종이 22세가 되던 해였다. 수렴청정 때도 왕이 20세가 되면 친정을 시작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흥선대원군은 고종에게 권력을 물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흥선대원군 집권 당시 청나라의 동치(同治)황제 역시 어머니 서태후의 섭정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동치황제는 1873년 18세의 나이로 친정을 시작했다. 이 사실을 알았던 고종은 아버지에게 큰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때 올린 최익현의 상소문은 고종 입장에서는 가뭄의 단비와 같았다. 흥선대원군은 최익현을 아버지와 아들을 이간하는 흉악한 인물로 규정했지만, 고종은 최익현의 상소문을 정직하다고 평가하며 최익현을 적극 지지했다.
이제 고종은 아버지의 그늘 속에 있는 나약한 소년이 아니었다. 다급해진 흥선대원군이 고종을 직접 찾아가 10년간 섭정 기간에 자신이 한 업적을 언급했지만, 고종은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스스로 물러나기를 재촉한 것이다. 

결국 흥선대원군은 10년 만에 권력을 접고 1874년 봄 운현궁을 떠나 양주의 직동으로 낙향했다.
고종의 나이 23세였고, 1년 후 그렇게 기다리던 아들(후의 순종)도 태어났다.
이제 고종의 친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듯했지만, 고종 입장에서는 아버지만큼이나 강력한 부인 명성왕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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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 일러스트 : 정윤정]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자료제공 매경이코노미
발행일 2016.10.04기사입력 2016.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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