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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증은 11세기 송나라 때의 정치가이며 관리이다. 이름은 낯설지만 인물이지만 그가 바로 드라마로 유명해진 명판관 ‘포청천 包靑天’의 실제 인물이다.
포청천은 부정부패를 일삼고, 권력과 돈의 힘으로 백성을 억압하는 고관대작과 간신들을 엄격하고 공정한 재판으로 처벌해 중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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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시대, 포증이 필요하다 

2016년 9월28일, 이 날을 기해 한국사회는 역사상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정신 및 정서 혁명의 시작점에 섰다. ‘한국적인 정’으로 용인되던 청탁 문화가 법으로 금지된 것이다.
이른바 ‘김영란법’(법률명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발효되면서 국민 모두는 불편과 기대감을 동시에 맛보고 있다. ‘부정청탁’을 방지하기 위해 ‘직무관련성’이 있는 모든 ‘인간 관계’에 차단벽을 쌓은 것이다.
제안자인 김영란 전 권익위원장마저 “이 법이 정말로 시행될 줄 몰랐다”고 술회할 정도로 한국사회의 부정부패와 청탁 문화는 그 뿌리가 깊고도 넓다. 이 법에 따라 하루아침에 약 400만 명의 직접 대상자를 정해 금지했고 그 직접 대상자와 연관 있는, 이를테면 교사와 대면이 가능한 학부형 등을 포함하면 사실상 전 국민에게 이 법은 실효를 미치는 것이다.
 
“무슨 5호담당제도 아니고 모든 관계를 의심하고 밥 한 끼 같이 먹는 것도 걱정해야 하는 것이 불편하다”, “화원이나 영세 자영업자는 다 죽어나갈 판이다”라는 등의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고 그럴 가능성도 충분하지만, 반증하면 그만큼 한국 사회는 그동안 ‘오피셜한 관계’를 넘어선 ‘사적인 관계’에 의해 지배당했다는 뜻도 된다. 

대학 친구 사이인 기업 오너와 검사는 무려 140억 원이 넘는 금전 거래를 ‘대가성이 없는 단순한 친구 사이의 호의이기에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항변하고 ‘힘 있고 장래가 촉망되는 공직자’에게는 ‘후일을 기약하는 스폰서’가 붙어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물론 ‘김영란법’이 우리 사회에 만연된 부정과 비리를 단번에, 모두 해결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10억 원의 뇌물을 받았던 ‘누군가’가 몰라서 받은 것이 아닌 것처럼 더 은밀하고 대담하게, 규모가 커진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여전히 돈과 청탁이 오고 갈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이 같은 ‘불편한 시험’에 말없이 응시하는 것은 공정하고 청렴한 사회가 된다면 지금보다 나은 많은 기회와 기대를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회 분위기에 딱 들어맞는 중국 역사의 한 인물을 소환해본다. 바로 포증이다.
포증은 11세기 송나라 때의 정치가이며 관리였다.
그는 중국 역사에 숨어있는 영웅도, 처세의 달인도 아니다. 이름만 대면 대한민국 사람 모두가 “아, 그 사람”하고 고개를 끄덕일 낯익은 인물이다.
바로 명판관 ‘포청천 包靑天’이다. 포증의 자는 희인, 호가 청천, 시호는 효숙이라 후대 사람들은 그를 포청천, 포효숙 혹은 높여서 ‘포공 包公’이라 불렀다. 

포증은 우리에게 검은 얼굴과 이마의 초승달로 익숙했던 드라마 <판관 포청천>의 실제 주인공이다. 포청천은 드라마 속 이야기처럼 부정부패를 일삼고, 권력과 돈의 힘으로 백성을 억압하는 고관대작과 간신들을 엄격하고 공정한 재판으로 처벌한 관리로 중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중국 역사에서 드라마, 영화, 소설로 가장 많이 묘사된 인물은 아마도 <삼국지>의 주인공들일 것이다.
또한 <초한지>의 유방과 항우도 그에 필적할 만하며 <수호전>의 108명의 영웅 등도 중국인이 사랑하는 역사의 인물들이다.
하지만 한 시대나 국가가 아닌 개인으로 가장 많이 극화되고 대중들에게 회자된 인물은 단연 포청천이다.
그의 업적은 생전의 송나라 때는 물론이고 남송, 금, 명, 원나라를 거치면서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냈고 청나라 말엽에는 석오곤이 쓴 <삼협오>를 통해 하나의 스토리가 완성되었다. 또한 1994년에는 드라마로 만들어져 중국권과 한국에서 인기가 높았으며 그 뒤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와 드라마만도 모두 500여 편 이상 만들어졌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그를 역사의 인물에서 지옥을 관리하는 신의 경지로 격상시킨 후 민간신앙의 주인공으로 곁에 두었다.
그를 모시는 사당인 합비 포공사는 지금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는 청렴과 결백 그리고 공정과 신뢰의 인물이며 특히 이 모든 것이 백성을 위한다는 한 가지 목적과 신념으로 이를 실천한 관리였다.
그에게 명예와 지위, 돈과 권력은 우선되지 않았다. 포청천은 황제의 친척부터 일반 양민까지, 오로지 법과 정의의 잣대를 똑같이 들이댄 유일한 인물이기에 중국인들은 지금도 그를 존경하고 있는 것이다. 부정부패가 심해지고, 점차 공정한 기회가 박탈되어가는 현대사회에서 포청천의 존재를 다시 생각하는 것은 그만큼 그와 같은 청백리의 존재가 필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포청천과 같은 관리가 우리 사회의 힘 있고 영향력 있는 자리에 단 10명만 앉아 있어도 굳이 ‘김영란법’이 필요할까? 이런 의문과 아쉬움이 동시에 고개를 든다. 

▶부모 공양 위해 관직을 포기하다 

포증은 송나라 진종 때인 999년 여주부 한위성 합비현에서 출생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학자 집안으로 합비현에 포 씨 성씨촌을 이루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포원외는 종5품 조산대부까지 지냈지만 하급관리였다. 포증은 위로 형이 두 명 있었지만 무려 스무 살 차이가 났다. 포증은 늦둥이였다.
그의 어머니는 며느리와 같은 해 임신을 해 부끄러운 나머지 낙태하려 했지만 범상치 않은 태몽을 꾼 이후 마음을 고쳐먹고 포증을 낳았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활달하고 영리했던 포증은 아버지와 독선생에게 글과 학문을 배웠다. 그리고 동네 일가친척은 물론이고 양민이나 하인의 자식들과도 격의 없이 잘 어울렸다고 한다. 

포증이 첫 관직에 나간 것은 28세인 1027년 인종 때였다. 그는 추천직인 음서로 관리가 되었지만 정묘과 과거에서 진사에 장원으로 합격해 정식으로 벼슬을 받았다.
건창현 지현으로 종8품이었다. 포증은 벼슬을 얻은 것도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늙은 부모를 직접 모시지 못하고 객지로 나가는 것을 염려했다.
건창현 지현 시절에도 항상 고향에 있는 노부모를 걱정했다고 한다.
결국 포증은 관직을 사임하고 노부모를 모시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에게는 나라에 대한 충성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효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 

포증은 부모를 극진히 모셨다.
차례로 부모가 돌아가시자 무덤에 초막을 짓고 3년 상을 마쳤다. 그리고 1037년 39세에 다시 관직에 복귀했다. 포증은 감찰어사 대행, 지간원 등 감찰과 간언을 담당하는 부서에서 근무했다. 타고난 성품인 공명정대, 엄격함과 딱 맞는 직책을 수행한 것이다.
당시 송나라는 유약한 학문과 문관의 나라였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송나라의 언로는 열려있었다.
그것은 송나라를 건국한 태조 조광윤이 특히 문신에 대한 우대정책을 펼쳤고 그들의 간언을 벌주지 말라는 유지를 후임 황제들에게 전했기 때문이다. 자유롭게 언로가 열려있는 송나라 조정의 기풍 덕도 있었지만 포증은 간언을 하는데 일고의 주저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안정기에 접어든 국가나 기구에 자연스럽게 싹트기 시작하는 부정부패를 사전에 방지하고 척결해야 한다는 등의 강력한 개혁과 청렴하고 공정한 사회를 주장했다.
그러기 위해 우선 중앙 및 지방 관청의 지출을 줄여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덜어줘야 하고, 이와 함께 지방관의 부정 방지와 엄격한 처벌 그리고 변방 등 국경 일대를 정비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상소를 수시로 황제에게 올렸다.
하지만 안락함에 이미 흠뻑 젖은 황제와 조정의 관료들은 그의 주장을 무시했다.
나라는 점차 부정부패가 심해지며 ‘이대로는 못 살겠다’는 농민들이 주동이 된 작은 반란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친척을 엄중히 처벌해 부패를 막다 

포증은 지방관으로 발령받았다. 그는 작은 지방 관청에서 근무하면서 송나라 수도인 개봉과는 또 다른 밑바닥 백성들의 현실에 직면했다.
그들은 나라의 백성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하나도 행사하지 못했으며 불의와 억압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포증은 이 같은 현실에 분노와 절망을 느꼈고 백성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연민을 갖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지방관으로서 백성들을 괴롭히는 각종 세금을 없애고 벼슬아치와 힘 있는 자를 우대하는 악정을 개혁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포증은 이를 실천에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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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지방관으로 오자 먼 친척 하나가 포증의 세를 이용하려 들었다.
지금으로 치면 “내가 포증하고 사촌인데 잘 말해서 이권사업 하나 따게 해줄게”라고 얘기해 중간에서 돈을 가로챈 것이다.
이 일을 포증이 알게 되었다. 포증은 즉시 친척을 잡아 들였고 엄하게 법에 따라 처벌했다. ‘설마 그래도 친척인데’하는 마음을 갖고 감옥에 갇혀서도 느긋했던 친척은 그제서야 자신의 잘못을 빌었지만 소용없었다.
이 사건이 인근 지역에 널리 알려졌다. 포증의 권세를 이용하려던 친척과 친지들은 그 뒤 아무도 포증을 찾지 않았다. 물론 포증도 그들과의 만남의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포증의 법 집행은 엄하고 공정했다. 

그가 광동성 조경에 근무할 때이다. 이 지역은 명품 벼루의 산지로 유명해 황실에도 진상되었다.
이 지역의 관리들은 이를 빌미삼아 벼루를 무리하게 걷어 들였고 그 숫자는 실제 황실 진상품보다 몇 배나 많은 물량이었다. 백성들은 하루 종일 벼루를 만들어도 막상 손에 쥐는 것은 없었다. 중간에서 관리들이 숫자를 부풀려 착복했기 때문이다.
포증은 부임하자마자 이 같은 사실을 파악하고 진상품의 숫자를 자신이 직접 점검했다. 그러자 중간에서 착복을 일삼던 관리들의 횡포는 없어졌고 백성들의 삶은 조금씩 나아졌다. 물론 포증에게도 당연히 유혹이 있었다.
토박이 관리들은 “전임 지방관들도 다 이를 알고 있었지만 눈을 감아 주었습니다. 물론 그 대가는 저희들이 잘 알아서 처리했습니다”라고 포증을 넌지시 떠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포증은 원칙대로, 법대로 그리고 백성을 위한 행정을 펼쳤다. 

포증은 엄하기도 했지만 현명했다. 당시 지방관들은 행정, 군사는 물론 백성들의 송사까지 관장하는 판사의 역할도 해야 했다.
하루는 한 농민이 관청에 와 호소를 했다. 소를 기르고 있는 농민이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외양간에 가보니 소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고 자세히 살펴보니 누군가 소의 혀를 잘라 버린 것이다. 전 재산인 소가 이렇게 되니 농민은 울면서 포증에게 범인을 잡아달라고 간청했다.
이야기를 들은 포증은 그 농민에게 이 같은 사실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고 소를 도살해 팔아버리라고 명령했다.
당시 법률은 소의 밀도살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농민은 이미 혀가 잘린 소가 다시 살아날 수도 없고, 또 포증이 허락한 것이라 소를 도살해 팔았다.
그리고 다음날, 다른 농민 하나가 소를 밀도살해 판 사람이 있다고 고발을 했다. 포증은 그 고발인을 불러 심문을 해보고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다. 

“네 이놈, 네가 그 소의 혀를 잘라놓고 이제 와서 밀도살 했다고 고발을 하느냐? 내가 그것을 모를 것 같았느냐? 네가 어찌 그 농민이 소를 도살해 팔았는지 알았느냐. 바른대로 사실을 고하라”고 소리쳤다.
고발인은 엎드려 자신의 죄를 자백했다.
사사로운 원한이 있어 소의 혀를 잘랐고 그 농민을 지켜보다 밀도살하는 것을 보고 관청에 고발한 것이다. 이 같이 포증은 권력과 부를 가진 자의 횡포를 막는 정치를 펴는 동시에 백성들끼리의 사소한 송사마저 공명하고 정대하게 처리해 명관리, 명판관으로서 그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그럴수록 포증은 처신을 더욱 조심했다. 그는 먹는 음식부터 생활까지 당연히 검소하고 소박하게 했고 청백리로서 사소한 오해나 부정의 유혹이 미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포증은 그 뒤 여주부윤, 삼사호부판관, 하북로전운사 등의 직책을 역임하고 마침내 송나라 수도인 개봉부 부윤으로 등용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서울 시장이 된 것이다. 당시 개봉부는 인구가 150만 명에 육박하는 대도시였다. 황제가 있는 도시였고 송나라의 모든 권력과 부와 명문세가가 모여 있는, 한마디로 특권의 특별시였다.
개봉에서는 조정 및 권문세가는 물론이고 황실 인척의 부정과 부패 그리고 횡포가 당연시되면서 국법도 통용되지 않았다.
인종은 이 같은 개봉부의 부정을 뿌리뽑기 위해 많은 조치를 취하고 개봉부 지윤을 수없이 교체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인종은 청백리와 엄격함의 대명사로 이름 높은 포증을 불러들인 것이다. 1056년 포증은 개봉부에 취임했다. 

▶권문세가, 황족의 특권을 처벌하다 

당시 개봉부부윤은 시장으로서 수도 행정은 물론 재판까지 담당하는 판관의 역할도 수행해야 했다.
포증은 부임하자 바로 일반 백성의 불편을 덜어주는 일에 착수했다. 그것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절차를 바꾼 것이다. 지금까지는 백성이 관청에 송사를 할 때는 대리인이 있어 그가 고소장이나 탄원서를 쓴 다음에 관청의 담당관을 통해 지부에 전달되는 절차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대리인과 유착된 담당관의 뇌물수수와 부정한 개입이 많아 일반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포증은 이에 대해 “앞으로는 억울한 일을 당했거나 송사를 하려며 개봉부 앞에 설치된 북을 직접 쳐라”라고 명령했다. 민원인이 직접 포증에게 연락하는 일종의 ‘신문고’를 만든 것이다. 그러자 중간에서 뇌물을 착복하는 관리들의 부정이 없어졌다.
개봉부 백성들은 이 한 가지 조치만으로도 포증의 백성을 위한 실천하는 행정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개봉에는 혜민하라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어느 해 개봉부에 홍수가 났다. 큰 피해를 입었는데 조사를 해보니 곳곳에 수로가 막혀서 범람이 일어났고 피해가 커진 것이었다.
수로의 좋은 곳에 권문세가의 화원과 누각이 자리 잡고 있어 원활한 물 흐름을 방해한 것이다. 포증은 당장 모든 누각과 화원의 철거를 명령했다.
그가 인종의 신임을 얻고 있고 또한 청탁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권문세가들은 어쩔 수 없이 누각을 헐고 화원을 허물었다.
그런데 딱 한 집만이 철거를 안 하고 있었다. 그는 땅문서를 가지고 와 “내 땅에 내가 누각을 지은 것이기에 철거할 수 없다”고 버텼다. 그는 황실과 가까운 세도가였다.
포증은 철저한 조사를 통해 땅문서가 위조되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리고 이를 인종에게 직접 고했고 인종은 황실 인척에게 누각 철거를 명령했다. 이만큼 포증의 법 집행은 엄정했고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인정과 권력에 좌우되지 않았다. 

개봉부윤으로서의 직책을 수행하면서 포증은 인종에게 황족과 권신들의 특권 폐지를 지속적으로 간언했다. 그때 포증과 대결한 이가 장요좌이다.
장요좌는 인종이 총애하는 장귀비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장요좌의 사촌 동생인 장요봉이고 그의 딸이 장귀비인데 장요봉이 일찍 죽어 장귀비가 장요좌에게 많이 의지한 것이다. 인종은 장귀비에게 푹 빠졌다.
곧 장요좌를 삼사사에 임명한다는 교지가 내려왔다. 그러자 포증은 이를 정면에서 반대했다. 포증은 “장요좌가 그렇지 않아도 많은 직책을 맡고 있는데 나라의 살림을 책임지는 최고재정장관인 삼사사에 임명되는 것은 안됩니다”라고 무려 5번의 반대 상소를 올렸다. 

인종은 고민했다. 포증의 상소도 이해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청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주저하는 인종 앞에서 포증은 다른 대신들과 이를 두고 논쟁을 벌였고 그 와중에 인종의 얼굴이 침이 튀었다고 한다.
얼마나 격렬한 논쟁이 오고갔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자 인종은 중재책으로 장요좌가 맡고 있는 선휘사, 경령궁사 직책을 내놓은 선에서 포증의 반대를 받아들였다.
포증은 상소에서 “장요좌가 장귀비의 권세만 믿고 능력에 맞지 않게 높은 자리에 앉아 부끄러움도 모르니 그는 깨끗해야 할 조정의 오물 같은 자입니다”라고 강하게 비판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황제와 장귀비의 관계를 알고 있으면서도 이와 같은 비판을 서슴지 않을 정도로 포증은 엄격했다. 

그 뒤 조정의 관료들과 권문세가들은 포증의 탄핵을 ‘포탄 包彈’이라고 부르며 그의 거침없는 비판을 두려워했다.
또한 포증에게 ‘철면무사 鐵面無私’ 즉 포증은 절대 사사로운 인정에 구애받지 않는 철가면을 쓴 관리라고 평가했다.
누군가 그에게 뇌물을 주려 하자 다른 이가 “그가 청렴한 사람이란 건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 그런 부질없는 짓은 하지도 말라” 충고했다고 한다.
개봉부의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청탁이 통하지 않는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염라대왕이고 또 한 명이 바로 포증이다” 할 정도의 그의 공명정대함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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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사위도, 자신의 친척도 처벌하다 

포증에게 예외는 없었다. 황제의 사위도, 자신의 조카도 죄를 물었고 외삼촌이 죄를 범하자 장형에 처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에서 포증은 점차 모든 인간 관계를 단절했다.
친구도, 친지도 그와 멀어졌고 그 역시 이들과 서신 교환까지 두절할 정도로 엄격하게 처신했다. 인간적으로 보면 외롭고 처량하기까지 한 청백리의 모습이었다.
박기종 커리어코칭칼럼니스트자료제공 Citylife
발행일 2016.10.19기사입력 201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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