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정상석

가을 바람이 솔솔 불어온다. 하늘은 더 없이 높고, 뭉게구름이 곳곳에 하얀 점을 찍어놓았다. 아, 아름답다. 땅 위에서 보는 하늘도 이리 장관인데, 산 위라면 어떨까? 수십 번이나 봤을 가을 풍경이지만, 갑자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름 동안 무더위를 핑계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일 테다. 등산의 계절이 성큼 다가왔다. 다시 가을 향기가 퍼져 있을 산으로 가야겠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1000m급 산 중에서 가리왕산이 나를 불렀다. 맞다. 내가 산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언제부터인가 그 산이 나를 부른다.

작지만 커다란 나만의 정원

가리왕산자연휴양림은 강원도 정선의 가리왕산 중턱에 자리한다. 국립자연휴양림으로 숲속의 집, 산림문화휴양관, 야영장, 오토캠프장 등의 숙박시설이 휴양림 곳곳에 있다. 휴양림 둘레로 출렁다리와 무명폭포 등의 명승지가 있는 산책로가 있고, 아이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공예품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어 가족 여행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솔로 캠퍼들 사이에서 이곳은 특히나 한 번쯤 머물고 싶은 곳이다. 다른 휴양림과 모든 시설이 비슷하지만, 매력이 하나 더 있기 때문이다. 바로, 나무로 둘러쌓인 오토캠핑 텐트 사이트가 그것이다. 사이트는 자동차 한 대가 들어갈 만한 공간 옆에 텐트를 칠 수 있는 데크와 나무 테이블로 구성되어 있다. 대형 텐트는 자리잡기가 힘든 크기로 소규모의 캠핑을 즐기기에 적당하다. 사실 혼자 떠나는 캠핑이 즐거운 것은 분명하지만 다른 캠퍼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곳은 혼자 밥 먹고 책 보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일일이 공개할 필요가 없다. 잎이 풍성한 한여름에는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말 그대로 비밀의 정원이다. 가을에 접어든 야영장은 잎 사이로 조금씩 그 안이 들여다 보이지만 여전히 알듯 말듯 가려진 모습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휴양림에 도착해 구역 하나를 잡아 공간을 마련하니, 상상 속 정원을 가진 기분이었다.

좋았던 날씨는 가리왕산으로 출발하는 날 갑자기 흐려졌다. 심지어 휴양림에 도착할 때쯤 빗방울까지 떨어졌다. 걱정이 태산이었다. 비오는 날 등산은 주변 온도에 민감한 나에게 쥐약이기 때문이다. 쉽게 추위를 느끼니 제대로 된 준비가 아니라면 산행은 엄두도 못낸다. 여름과 가을 사이 애매한 옷차림으로 산에 오르기는 무리가 있었다. 이럴 땐 그저 천지신명을 찾을 수 밖에 없다.

‘가리왕산님, 부디 좋은 날씨를 주세요.’

여름의 성수기를 지낸 한가로운 야영장에서 또 한 번의 나홀로 야영을 시작하며,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잠들었다.

때로는 길을 벗어나기도 한다

가리왕산 등산을 하려면 휴양림 내에 차를 세워 두거나 관리소에 짐을 맡겨야 한다. 그리고 사이트에서 철수할 때는 번호표를 반납해야 다음 캠퍼가 빈 공간을 여유롭게 찾을 수 있다. 나 또한 서둘러 짐을 꾸리고 산으로 향했다. 그런데! 아침부터 길을 헤매다니! 등산로 초입을 잘못 파악하고, MTB 도로를 걸은 것이다.

허둥대느라 루트 점검을 똑바로 하지 못한 게 원인이었다. 어젯밤 기도가 무색하게도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길을 잘못든 것에 대한 대상 없는 불평과 흐린 날씨는 나를 더욱 심술궂은 패배자로 인도했다. 나는 ‘잘못 되었음’을 감지하면서도 끝내 그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꾸역꾸역 올라가다 결국 ‘정선 MTB 4km’라는 푯말을 발견하고서야 비로소 쓸데없는 아집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출발지점으로 돌아가는데 걸린 시간까지 2시간을 허비한 셈이었다. 물론 모든 것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이럴 땐 절대 스스로를 책망하지 말아야 할 것’, ‘오히려 실수한 자신을 스스로 용서하고 격려할 것’ 등 캠퍼라면 한 두 차례 겪었을 일상의 진실을 되새기게 되었으니, 두 시간 만큼 성숙했다고도 할 수 있다. 나 역시 그 잃어버린 시간이 여름 내내 잠들어 있던 온 몸의 근육과 세포들을 깨우기 위한 연습 과정이었노라며 위로했다. 잘못된 길을 돌아 오면서 날씨에 대한 불평도 금세 사그라들었다.

그때, 하늘이 열리기 시작했다. 구름이 걷히고 파란 하늘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어쩌면 가리왕산님은 어젯밤 내 기도를 들어주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준 것이 아닐까? 등산로 입구인 심마니교를 다시 건너 이번에야 정말로 산에 들어섰다.

정상 앞 마지막 숲

정상으로 향하는 길에 내리막도 있다

가을 문턱을 넘은 숲은 모든 것이 분주하다. 일교차가 크니 나뭇잎과 꽃잎 위로 이슬이 맺힌다. 잎에 맺힌 물방울들이 종소리를 낼듯 맑고 청아하다. 바람이 한 번 숲을 스치면, 나무에 매달려 있던 도토리들이 토도독거리며 땅으로 떨어진다. 사방팔방에서 다람쥐가 뛰어다니며 정신없이 도토리를 주워 먹는다. 모습을 잘 내보이지 않던 뱀들도 어느새 떨어진 낙옆 사이를 스르륵거리며 여러번 눈에 띈다.

숲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저마다의 소리를 내며 숲 안을 가득 채운다. 한 곡의 잘 짜여진 오케스트라 합주곡 같다. 색의 변화도 시작된다. 높고 파란 하늘, 뜨겁지 않은 하얀 태양빛, 이제 막 붉어지기 시작한 단풍잎이 조화롭게 빛난다. 나무들도 몸통의 가지를 조금씩 벗겨내며 속살을 내비치고, 마지막까지 매달려 있던 꽃잎들도 이별을 준비하듯 색을 줄인다.

이쯤되니, 가을 숲은 오케스트라를 넘어 한 편의 오페라다. 숲의 클라이맥스인 정상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덩달아 경쾌했다. 적어도 한 시간 삼십분 정도 걸린 ‘어은골 임도’ 지점까지는 무대를 즐기며 밝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가파르지 않은 숲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등산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1561m의 정상이 그리 녹녹하지는 않을터. 당연한 것이라고 해도, 여름 내내 게을러도 너무 게을렀다는 것을 자책할 수 밖에 없었다. 경사도가 있기는 해도 험하지 않은 등산로였음에도, 세 걸음 걷고 그보다 더 오래 쉬고 겨우 다시 일어나 걷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굴욕도 이런 굴욕이 없다. 오르면 오를 수록, 숨이 차면 찰수록, 스스로의 미련함과 게으름을 깊고 깊게 반성해 본다.

나뭇잎 사이로 간간이 보이던 하늘이 산 너머로 넓게 보여질 때의 캠퍼의 가슴에는 기쁨과 환희가 밀려온다. 정상이 멀지 않았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정상에서의 감격보다 더 짜릿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가파른 등산로가 끝나고 호젓한 숲길이 나오면 정상은 말 그대로 코앞이다. 온 숲이 가을의 붉은 빛으로 물들 것을 상상해보니 이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었다.

드디어 ‘마항치삼거리’ 지점에 도착했다. 기괴하면서도 아름다운 나무 하나를 등지고 몇 번의 낮고 짧은 오르막을 지나, 키작은 나무들 사이를 헤치고 나면 드디어 정상석과 그 옆 돌탑의 머리끝이 눈앞에 보인다. 깊은 숨을 몰아 내쉬며 스스로가 이토록 대견할 수 없는 환희에 휩싸인다. 그리고 내려다 보는 땅, 대한민국은 참으로 아름답다. 한참을 머물고 또 바라봤다.

이내 오를 때 힘겨움은 사라지고, 때 이른 추위가 온 몸을 감싼다. 땀이 흐른 후에는 저체온증에 각별히 신경써야 하는 계절이 왔다는 것을 체감하고, 내려오기 싫은 마음을 다잡으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배낭 없는 하산길은 언제나 그렇듯, 날다람쥐처럼.

6km 왕복, 출발 고도 400m, 정상 고도 1561m, 이날의 소요시간 6시간, 등산 전 MTB 전용길 8km 정도의 두 시간 산책-산행에서 말하는 ‘알바’(생각한 루트가 아닌 길을 갔을 경우 부르는 말)까지, 분주했던 숲 속 친구들처럼, 가을맞이이자 겨울대비인 등산과 야영을 완료했다. 가리왕산님의 부름에 응한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었다. 여름은 끝났다. 자, 이제 다시 시작. 일단 정선의 최고 밥상이라 손꼽고 싶은 곤드레밥부터 먹어야겠다.

Info

강원도 정선군 관광문화

http://www.ariaritour.com 1544-9053

가리왕산자연휴양림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가리왕산로707 033-562-5833

www.huyang.go.kr

입장료 1000원

숲속의 집 4인 기준 3만7000원 / 산림문화휴양관 5인 기준 4만2000원 / 야영데크 7000원 / 오토캠핑장 9000원

숙박 이용 인터넷 예약

대중교통 정선읍에서 회동방면 농어촌버스 이용, 가리왕산 입구 하차(7회/일, 약 40여분 소요)

곤드레밥집

동박골식당 | 정선읍 정선로1314 / 033-563-2211

싸리골식당 | 정선읍 정선로1312 / 033-562-4554

정선풍경 | 정선읍 봉양2길 17-2 / 033-563-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