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걸 좋아하다가는 죽어서 지네로 환생할 겁니다.”
19세기 티베트의 한 승려가 한 얘기다.
티베트에서도 지네는 환영받는 곤충은 아니었나 보다. 하나씩 세보지 않으면 몇 개인지 알 수도 없는 수많은 다리가 꿈틀거리는 지네는 독도 지니고 있어 물리면 꽤 아프다. 다들 무심코 발걸음을 내딛다 발밑에서 지네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란 경험이 한두 번씩은 있을 터다.
지네는 발이 100개라는 뜻에서 영어로 ‘centipede’라고 불린다. 사실 마디마다 발(정확히는 다리)이 한 쌍씩 있는데 대부분은 50마디가 안 되기 때문에 다리가 100개는 안 된다. 지네류는 8000여종이나 되지만 다리가 딱 100개인 경우는 없는데, 마디가 늘 홀수기 때문이다. 지네는 종에 따라 길이가 수㎜밖에 안 되는 것에서 30㎝가 넘는 녀석까지 있다. 한약재상에서 볼 수 있는 말린 지네는 왕지네로 몸길이가 보통 15㎝는 넘는다.
이 징그럽게 생긴 지네가 최근 주목을 받고 있다. 학술지 ‘플로스원’ 11월호에 지네의 게놈을 해독한 연구 결과가 실리면서다. 미국, 독일 등 여러 나라의 50여개 기관 100여명의 과학자들이 참여한 공동 프로젝트의 결과다. 벌레 한 종의 게놈 해독에 뭐 그렇게 요란을 떠는가 싶지만 지네는 육상동물의 진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생물체다. 지난 2004년 발표된 4억3000만년 전 최초의 육상동물 화석이 지네가 속하는 다지류 동물이었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이 크기가 작고 다리가 많은 종류인 땅지네 한 종의 게놈을 분석했는데, 게놈 크기가 약 3억염기쌍으로 사람 게놈의 10분의 1에 불과했지만 유전자는 1만5000개로 사람보다 6000여개가 적을 뿐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 후각 유전자가 서로 다른 점 등 게놈 구성이 멀지 않은 친척인 곤충류와 꽤 차이를 보였다. 연구자들은 이번 지네 게놈 해독과 함께 다른 벌레의 게놈을 추가로 해독해 비교하면 초기 육상동물의 진화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육지 올라온 최초의 동물
유전자 수 인간과 비슷해
순수 과학자들만이 지네에 관심을 보이는 건 아니다. 학술지 ‘미국립과학원회보’에는 지네 독의 한 성분이 모르핀보다도 강력한 진통제로 작용한다는 연구 결과가 실린 적이 있다. 뱀이나 벌, 지네의 독은 보통 수십~수백 가지 성분으로 이뤄져 있어 동시에 작용하면 조직에 손상을 주지만 개별 성분은 때로 유익한 효과를 내기도 한다.
중국과 호주의 연구자들은 왕지네의 독을 성분별로 분리한 뒤 각각의 효과를 조사한 결과 특정 단백질(Ssm6a)이 탁월한 진통 효과를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쥐를 대상으로 다양한 통증을 유발한 뒤 모르핀과 진통 효과를 비교한 결과 화학물질에 의한 통증에는 더 뛰어났고 열이나 산에 의한 통증 완화 효과는 비슷했다.
오늘날 전 세계 인구의 무려 20%가 만성 통증에 시달리고 있고 이에 따른 직간접 비용도 꽤 높다. 미국만 해도 연간 6000억달러(약 600조원)에 이른다. 진통제가 여럿 나와 있지만 대부분 만성 통증에는 별 소용이 없고 모르핀 같은 강력한 약물은 마약성이라 부작용이 크다. 그런데 동물실험 결과 지네의 독성분은 약효는 모르핀보다 크면서 특별한 부작용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성분에서 영감을 얻은 차세대 진통제가 개발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지네에게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
 [강석기 과학전문가]
|
||
|
|
|||
